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 응징한 박기서 씨 별세: '정의봉' 사건과 역사적 의미
백범 김구 선생 암살범 안두희를 '정의봉'으로 응징했던 박기서 씨가 2025년 7월 10일 지병으로 별세했습니다. 향년 77세. 그의 행동은 역사적 정의를 실현했다는 평가와 함께 사적 제재에 대한 법적 논란을 동시에 불러일으켰습니다. 오늘은 박기서 씨의 삶과 그가 남긴 '정의봉 사건', 그리고 백범 김구 암살 사건의 숨겨진 진실을 되짚어보겠습니다.

박기서, '정의봉'으로 안두희를 응징하다
박기서 씨는 1948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나 버스 기사로 일하며 노동조합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름이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1996년 10월 23일, 백범 김구 선생 암살범 안두희의 자택을 찾아가 '정의봉'이라 이름 붙인 약 40cm 몽둥이로 안두희를 구타해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 때문입니다. 박기서 씨는 사건 직후 자수했으며, 자신이 '김구의 유지를 이어야 한다'는 역사적 소명의식을 갖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안두희가 백범 암살범으로 사법 처벌을 회피했다고 믿었으며, "의로운 일을 했기에 후회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행동은 법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검찰은 징역 8년을 구형했고, 1심에서는 징역 5년, 항소심에서는 징역 3년으로 감형되었습니다. 대법원은 1997년 11월, "동기에 정당성이 있어도 법 질서 위반은 용납될 수 없다"며 징역 3년 형을 확정했습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의 대사면으로 1998년 3월 출소한 그는 이후 개인택시 면허를 취득해 택시 기사로 생업을 이어갔습니다. 또한 효창공원 애국지사 묘역 복원 추진위원장을 맡고, 2018년에는 '정의봉'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하며 역사의 기억을 사회적 자산으로 남기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백범 김구 암살 사건: 숨겨진 진실과 역사적 평가
박기서 씨의 행동은 1949년 6월 26일 발생한 백범 김구 선생 암살 사건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김구 선생은 자신의 집무실인 경교장에서 당시 육군 포병 소위였던 안두희의 총격으로 피살되었습니다 당시 군 당국과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한국독립당 내부 당파·내분으로 인한 우발적 암살'이라고 규정하며 진실을 축소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1992년 안두희의 육성 증언이 공개되고, 1993년 국회에 백범 암살 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되면서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1995년 국회는 "사건은 단순 내분이 아닌 군부·정권 연루 모의였음"을 밝히는 보고서를 통과시켰습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사건 배후에는 장은산 포병사령관, 김창룡 육군특무대장 등 군부 고위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 묵인 의혹도 제기되었습니다. 김구 선생 암살 사건은 건국 초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정치·군사·정권이 얽힌 복합적 사건이었으며, 한국 현대사의 뼈아픈 일면으로 남아있습니다.

박기서의 삶이 남긴 사회적 메시지
박기서 씨의 안두희 응징 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일부에서는 그를 "의인" 또는 "제2의 독립운동가"로 칭송하며 민족정기 회복을 위한 상징적 행위로 평가했습니다. 9,200여 명의 탄원서와 쇄도하는 격려금, 위로 편지는 이러한 공감 여론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사법체계가 아닌 개인이 제재 행위를 한 것"이라며 법치주의 원칙을 강조하고, 사적 응징이 정당화될 경우 제2, 제3의 범죄 모방 우려를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행동은 국가가 처리하지 못한 과거의 잘못에 대한 개인의 응징이라는 점에서 정의 구현에 대한 열망을 반영합니다. 동시에 사법 체계가 무너질 때 사회적 공감이 법을 앞설 수 있다는 위험성도 제기하며, 법치주의와 사회 감정의 균형이라는 중요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박기서 씨의 별세는 그의 파란만장했던 삶과 함께 백범 김구 암살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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